판례 요약
법인의 대리인으로 계좌를 개설한 뒤 통장·체크카드·OTP 등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건당 보수를 받은 사건입니다. 피고인은 정식 위임 서류를 갖추고 계좌를 만들었다는 취지로 다투었습니다.
대법원은 대리권 서류의 형식보다 법인이 만들어진 목적, 실제 계좌 이용자, 전달 경위와 범죄 이용에 관한 인식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법인 내부의 정상적인 인계와 제3자의 불법 이용을 위한 접근매체 전달을 구분한 판결입니다.
01사건 개요
피고인은 ‘김 실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서 법인계좌 개설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 은행을 방문했습니다. 2017년 3월부터 8월까지 20개 법인 명의로 34개 계좌를 개설한 뒤 은행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통장, 체크카드, OTP와 비밀번호 등을 즉시 넘겼습니다. 건당 받은 돈은 7만~9만 원이었습니다.
법인들은 계좌 개설 무렵을 기준으로 설립된 지 약 1~5개월 된 곳들이었습니다. 피고인은 각 법인의 대표자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고, 명의를 제공한 사람들이 어떤 경위로 동원되는지에 관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계좌를 실제 사업 운영에 쓸 법인 관계자에게 통상적인 절차로 인계한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피고인은 보이스피싱이 아니라 스포츠토토용 계좌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했지만 불법적인 일임을 알면서 돈이 필요해 참여했다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개설한 계좌 중 다수는 보이스피싱, 연애를 빙자한 사기, 도박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항소심은 접근매체 전달 부분을 무죄로 판단했고 검사가 상고했습니다.
02쟁점
가. 계좌 개설 대리인에게 맡긴 서류가 있으면 전달이 적법한지
법인의 의사에 따라 계좌를 만들고 법인에 넘겨주는 일 자체와, 법인 명의를 빌려 제3자가 사용할 계좌를 공급하는 일은 구별됩니다. 대리인 형식을 취했다는 사실이 후자의 불법성을 없애는지가 문제였습니다.
나. 전달 당시 어떤 이용 목적을 알고 있었는지
이 사건에는 당시 구 전자금융거래법이 적용되었습니다. 보수를 받고 접근매체를 넘긴 경위와 함께, 그 행위가 다른 사람 명의의 계좌를 불법적으로 유통·이용하게 하는 역할이었는지를 살펴야 했습니다.
03판결
가. ‘전달’은 불법적인 유통·이용에 기여하는 점유 이전을 포함합니다
대법원은 접근매체 전달 금지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타인 명의 계좌의 불법 거래나 이용을 돕기 위해 접근매체의 점유를 이전하는 행위를 문제 삼았습니다. 법인의 실제 의사에 따른 정상적인 인계인지 여부는 형식적인 대리권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나. 법인과 계좌가 만들어진 목적을 함께 보았습니다
각 법인의 설립 경위, 계좌 개설 이유, 전달 동기, 계좌가 이후 이용된 방식 등을 종합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짧은 기간에 여러 법인의 계좌를 반복해 만들고, 대표자를 만나지도 않은 채 제3자에게 접근매체를 즉시 넘긴 사정이 중요했습니다.
다. 불법 이용 가능성을 알고 받은 보수에 주목했습니다
피고인이 스포츠토토용 계좌라는 설명을 들었고 불법성을 인식했다는 진술 등도 고려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유죄를 인정할 여지가 있는데도 무죄로 본 원심 판단에 잘못이 있다고 보아 해당 부분을 파기하고 서울남부지방법원으로 환송했습니다.
04의의
서류상 법인계좌 개설 대리인이었다는 점과 실제로 계좌를 공급한 역할은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위임 서류를 누가 마련했는지, 법인의 사업을 알고 있었는지, 은행을 나온 뒤 누구에게 무엇을 넘겼는지 등이 판단의 출발점입니다.
이 판결의 직접 쟁점은 접근매체 전달에 관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입니다. 보이스피싱에 사용된 계좌를 공급한 사람의 책임을 검토할 때, 사기 가담 여부와 별개로 이러한 전달 행위 자체가 문제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