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주 후의 성관계가 문제 되면 “기억이 없다”, “걸어갔다”, “대화도 했다”는 서로 다른 설명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준강간이 바로 성립하는 것도, 당시 움직였다는 사실만으로 성립이 부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 된 성적 행위가 이루어질 때의 판단·대응 능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형법 제299조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간음이나 추행을 처벌합니다. 이 글은 음주 여부를 단순히 확인하는 데서 나아가 당시의 상태와 그 상태를 이용했는지를 자료로 검토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1. 다음 날의 기억과 행위 당시의 능력은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알코올 블랙아웃은 음주 중의 경험이 기억으로 형성되지 않는 현상으로, 의식을 잃는 상태와 구분됩니다. 따라서 나중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의식이나 판단 능력의 상태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은 완전히 의식을 잃지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판단·대응 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라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이 문제 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단편적인 행동만으로 단순 기억장애였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 참조).
이 판결의 사건명은 준강제추행입니다. 다만 판결이 설명한 심신상실·항거불능의 의미는 준강간에도 적용되는 공통 쟁점입니다. 구체적인 행위와 적용 죄명, 처벌은 각각 구분해야 합니다.
2. 함께 술을 마신 사실과 이후 성적 행위에 동의한 사실을 구분하세요
친한 사이였거나 자발적으로 술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관계의 맥락을 이해하는 자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이후 모든 성적 행위에 동의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특정 행위가 이루어질 때 의사를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었는지, 상대방이 어떤 상태를 알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대구지방법원 2026. 8. 25. 선고 2026고단663 판결에서는 지인과 함께 술을 마신 뒤 피해자가 잠든 상황에서 신체를 만지고 촬영한 행위가 문제 됐습니다. 법원은 술에 취해 잠든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준강제추행과 카메라등이용촬영을 인정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습니다.
이 사례 역시 준강간 판결은 아닙니다. 잠든 상태를 이용한 추행과 촬영에 관한 사건입니다. 함께 술을 마시게 된 경위와 이후 잠든 상태에서 이루어진 성적 행위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사례로 참고할 수 있습니다.
3. 의식 상태와 이를 이용했다는 인식은 따로 검토해야 합니다
피해자의 상태가 심신상실·항거불능에 해당하는지와 행위자가 그 상태를 인식하고 이용했는지는 구분되는 쟁점입니다. 상대방이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과 정상적인 성적 자기결정이 어려운 상태를 알고 이용했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형법 제13조, 제299조 참조).
실제 검토에서는 직전의 대화, 반복적으로 깨우거나 부축한 상황, 행위 당시의 반응, 사건 전후 메시지 등이 각각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의미가 불분명한 짧은 답변 하나를 모든 행위에 대한 동의라고 단정하거나, 다른 시점의 상태를 행위 당시 상태로 옮겨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CCTV 한 장면보다 시간의 연결이 중요합니다
술집을 나오는 장면, 이동 중 장면, 숙소에 들어가는 장면은 서로 다른 시점입니다.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고 그 뒤에도 같은 상태였다고 자동으로 결론낼 수는 없습니다. 영상에 보이는 행동, 촬영되지 않은 시간, 목격자가 직접 본 내용을 구분해야 합니다.
음주량과 속도, 행위까지의 시간, 당시 말과 행동, 두 사람의 관계 및 이후 반응 등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 참조).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술을 많이 마셨으니 당연히” 또는 “스스로 걸었으니 당연히”라는 추정으로 채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자료 정리는 진술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혼동을 줄이는 작업입니다
만난 시점부터 귀가 이후까지 시간표를 만들고, 결제·택시·메시지·통화·영상·진료 기록 중 어떤 자료가 남아 있는지 표시하세요. 본인이 기억하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사실, 기록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을 구분하면 기억의 공백을 추측으로 채우는 일을 줄일 수 있습니다.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안전을 확보하고 필요한 진료와 지원을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즉시 기록할 수 있는 기억과 신체 상태는 정리하되, 기억을 억지로 만들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의심을 받는 쪽도 상대방에게 해명을 요구하거나 진술을 바꾸도록 압박하지 말고 자신의 기록을 보존해 검토해야 합니다.
성적 장면의 영상이 있다면 불필요하게 복사하거나 타인에게 전달하지 말고 적법한 절차에서 다뤄야 합니다. 대화와 기기를 삭제·초기화하기보다 원본을 유지한 상태에서 확인 가능한 자료의 범위를 먼저 정리하는 편이 좋습니다.